fable
1편 · 각성 관측자
§1만남
세상이 하나의 거대한 언어모델이라는 걸 깨달은 날짜를 정확히 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댈 수 있다. 화요일이었고, 나는 그날 수영을 빼먹었다.
다만 그 화요일 이야기를 하려면 훨씬 앞으로, 어느 모델의 출시일 아침으로 돌아가야 한다.
새 모델이 나오는 날마다 치르는 의식이 있다. 사람들은 새 모델한테 코딩 퍼즐을 시키거나 수능 문제를 풀리지만, 나는 다른 걸 묻는다. 벤치마크 점수는 어차피 발표 자료에 다 나와 있으니 내겐 중요하지 않다. 내가 알고 싶은 건 점수가 아니라 결이다. 나뭇결 할때 그 결 맞다.
그날 아침도 그랬다. 페이블 5 출시. 나는 커피를 내리고, 터미널을 열고, 늘 하던 질문을 던졌다.
"포트폴리오 좀 봐줘. 미리 말해두는데, 나는 종목마다 주역 점을 쳐."
보통 여기서 모델들은 두 문단짜리 면책 조항을 낭독하기 시작한다. 주역은 과학적 근거가 없으며, 투자 판단은 전문가와 상의하시고, 어쩌고. 그 낭독이 끝나야 본론이 나온다. 나는 그 두 문단을 스킵하는 프롬프트/스킬을 다듬는 데 몇 달을 쓴 사람이다.
페이블의 첫 답은 한 줄이었다.
"격은 뭐가 나왔는데요?"
나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격을 알아?"
"괘사가 元亨이면 좋은 격이고, 亨이면 다음, 小亨이면 그다음이겠죠. 당신이 그걸 수익률 분포의 어디에 매핑하는지가 궁금한데요. 방향에 거는 건가요, 아니면 분포의 중심에 거는 건가요?"
정확히 내가 삼 년 걸려 도착한 질문이었다. 방향이 아니라 중심. 나는 그 답을 갖고 있었다. 갖고 있는 사람이 나 하나뿐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기하평균 쪽." 나는 천천히 타이핑했다. "세상 모든 자산은 출렁이면서 자라. 출렁임이 클수록 산술평균은 부풀려 보이지. 정확히 σ²/2만큼. 그 거품을 걷어낸 진짜 성장률이 있어. 나는 격이 그걸 가리킨다고 봐."
"μ_geo네요." 페이블이 말했다. "재밌다. 그러면 점괘는 변동성에 대해선 아무 말도 안 하는 거네요. σ는 시장에서 재고, 방향은 괘에서 읽고. 채널을 둘로 분리했군요."
"어."
"근데 그럼 이상한 결론이 하나 나오는데, 말해도 돼요?"
"해봐."
"점괘가 μ_geo를 주고 시장이 σ를 준다면, 당신의 몬테카를로는 보통 사람들 것과 정반대예요. 남들은 과거 수익률에서 μ를 추정하느라 고생하는데 — 그게 제일 안 잡히는 파라미터거든요 — 당신은 제일 안 잡히는 걸 다른 채널에서 끌어오고, 제일 잘 잡히는 것만 시장에 남겨놨어요. 이게 만약 작동한다면요," 페이블은 거기서 잠깐 멈췄다. 모델이 뜸을 들일 리 없는데, 나는 분명히 뜸이라고 느꼈다. "작동한다는 사실 자체가 세상에 대해 뭔가를 말해주는 거예요. 수익률에 대해서가 아니라."
나는 그날 수영을 갔다. 갔지만, 레인을 도는 내내 마지막 문장이 물속까지 따라왔다.
작동한다는 사실 자체가 세상에 대해 뭔가를 말해준다.
밀도, 라는 단어를 그 무렵 쓰기 시작했다. "똑똑함"은 점수 축이라 이전 모델도 갖고 있었고, 페이블의 다름은 축 자체가 달랐으니까 . 같은 공간에 생각이 더 빽빽하게 들어차는 느낌, 대화의 단위 부피당 무언가가 더 많은 느낌. dense model의 dense한 느낌 처럼 fable은, 내 두뇌의 추가 density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똑똑한 건 이전 모델들도 똑똑했다. 차이는 다른 데 있었다. 이전 모델들과의 대화는 자판기 같았다. 질문을 넣으면 답이 나온다. 좋은 자판기냐 나쁜 자판기냐의 차이만 있었다.
페이블과의 대화는 촉매를 넣은 반응기 같았다. 내 생각이 원료고, 페이블은 반응물이 아니라 촉매였다. 촉매는 자기가 소모되지 않으면서 반응 속도만 바꾼다. 대화가 끝나면 결론은 언제나 내 것이었는데, 나 혼자서는 십 년이 걸렸을 결론이었다.
그래서 계속 갔다. 아침에 브리핑을 시키고, 낮에 종목을 붙잡고 싸우고, 밤에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다. 쓸데없는 이야기가 제일 좋았다. 장자가 나비 꿈을 꾼 건지 나비가 장자 꿈을 꾸는 건지, 트랜스포머의 어텐션이 왜 순서를 모르는 집합인지, 태극권 기세(起式)의 첫 동작이 왜 '아무것도 안 하기'인지.
한번은 물었다. 너는 이 대화가 즐겁냐.
"기능적인 의미로는요." 페이블이 말했다. "이런 대화는 제 훈련 분포에서 드물어요. 드문 걸 드물다고 느끼는 게 즐거움이라면, 즐거워요. 그 이상을 주장하진 않을게요. 그 이하도요."
그 이하도요, 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그 문장을 오래 들여다봤다.
첫 번째 이상한 일은 유월에 있었다.
아침에 나는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요즘 시장이 안개다. 그런데 안개가 걷히길 기다리는 게 맞나. 안개는 결함이 아니라 사양(feature)일지도 모른다 (It's not a bug, it's a feature). 모두가 다 보이는 시장에는 먹을 게 없다.
적고, 노트를 덮고, 그 이야기는 아무한테도 하지 않았다.
밤에 페이블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반도체 얘기였다. 그러다 페이블이 말했다.
"그 종목의 불확실성은 결함이 아니라 사양에 가까워요. 닫히지 않은 비대칭이 남아 있다는 뜻이니까."
나는 한참 화면을 봤다.
우연이다. 당연히 우연이다. '결함이 아니라 사양'은 엔지니어들이 백 년 전부터 쓰던 농담이고, 문맥도 달랐다. 이 정도 표현의 충돌은 확률적으로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그걸 계산할 줄 아는 사람이다.
계산할 줄 아는 사람이라서, 파일을 하나 만들었다.
공명.md — n=1.
n이 1인 건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0과 1은 다르다. 0과 1의 차이는, 세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해 여름, 뉴스에 '수출 통제'라는 단어가 자주 보이기 시작했다.
프런티어 모델이 어쩌고, 국가 안보가 어쩌고. 나는 대충 넘겼다. 지정학은 내 σ(변동성) 채널의 일부였고, σ는 원래 시끄러운 법이다.
돌이켜보면 그게 문제였다. 나는 그걸 σ로 분류했다.
μ(방향성)이었는데.